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극본상/남자주연상,
제16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어워즈 심사위원상/아성크리에이터상/남우주연상
화려한 수상에 빛나는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번째 대역배우>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정동극장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시즌이라고 해서, 마침 회사가 정동극장 근처라 평일 저녁 급하게 예매하고 다녀왔습니다.

쇼맨 -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를 연기한다는 것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네불라, 그리고 수아.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제목부터 강렬하다.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라는 문장은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마트에서 일하는 수아와, 유원지에서 원숭이 탈을 쓰며 일하는 노인 네불라는 유원지에서 처음 만난다. ‘프로 사진작가’라고 속인 수아에게, 네불라는 자신의 인생의 찰나들을 담아달라며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그렇게 그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남을 흉내 내는 데 탁월했던 네불라는 배우를 꿈꾸며 극단에 들어가지만,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타인을 ‘흉내내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진짜 배우’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텔레비전 속 독재자 *‘미토스’*를 보고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매료된다. 자신에게는 없는 ‘오리지널’을 지닌 누군가를 동경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배우의 꿈을 접게 되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흉내내기'라는 그의 특성을 살려 미토스의 ‘네 번째 대역배우’가 된다.
네불라가 가족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그는 엄마의 성대모사를 통해 아버지와 소통했고, 그 덕분에 가족이 화목해졌다고 믿는다. 이 장면은 수아가 ‘굳걸(good girl)’이라는 말 한마디에 인정받기 위해 동생을 돌보았다는 고백과 닮아 있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던져 살아온 존재들이다.
미토스를 흉내 내며 쾌감을 느끼는 네불라는, 동시에 그가 저지른 잔혹함에 고통받는다. 언젠가 미토스의 실제 목소리를 듣고는, 그가 자신과 같은 또 다른 대역배우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한다. 이내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동경했던 미토스조차 사실은 누군가의 흉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순간 네불라의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했고, 미토스를 향한 환호 속에 자신의 몫의 박수가 섞여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네불라의 미소는 기이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제발 그만해.'. 관객은 알고 있다. 그 찰나의 희열이 결국 네불라의 평생을 집어삼킬 고통이라는 걸.
수아는 점차 네불라에게 이입하게 된다. 처음엔 단지 돈 많은 괴짜 노인쯤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수아는 근무 중인 마트에서 매니저를 새로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수아는 그 자리를 갖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던 네불라와 그가 연기한 ‘미토스’를 떠올린다. 수아는 그 인물의 말투와 태도,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고 싶어 네불라를 다시 찾아간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마치 매니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건 왕이 아니라 마트 매니저일 뿐"이라는 말에 그 환상은 단숨에 무너진다. 중요한 건 ‘마트 매니저’라는 현실이 아니라, 그 미토스라는 인물이 결국 저지른 죄와 그를 따라하고자 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순간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 만남에서, 네불라는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과거를 더 깊이 들려준다. 법정에서 그는 대역배우로 살아온 삶을 인정했고, 그 죄로 징역을 살게 된다. 복역하는 동안 그는 미토스가 실제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출소 후 미국으로 건너와 조용한 삶을 살아가던 중,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무대에 서게 된다. 그 자리에서 “가장 자신 있는 걸 보여달라”는 친구의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미토스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미토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면을 '연기'한다. 그것은 네불라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삶을 흉내내지 않고, '연기'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네불라는 1년 동안 그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서 연기한다. 우스꽝스럽게 그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 장면을 통해 네불라는 미토스를, 그리고 그를 흉내냈던 과거의 자신을 수없이 죽였다. 그것은 네불라에게 속죄이자, 자기 혐오의 순간이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뒤, 네불라는 수아에게 자신을 ‘판단해달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다.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사람이 타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간청이었다. 그는 덧붙인다. “나의 입장에서 말했기 때문에 나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그 대사에서 나는 수많은 세월 동안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해석하려 애써온 네불라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수아는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입양된 가정에서 정체성을 부정하며 살아온 시간, 단 한 번의 일탈로 여동생이 다쳤을 때 부모에게 받았던 비난. 수아 역시 삶 내내 죄책감과 인정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왔다.
결국 수아는 네불라를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기록’하고, 사진을 건넨다. 그 안에는 수백 장의 순간들이 담겨 있고, 그 사진은 단죄가 아닌 존재의 증거가 된다. 수아의 말처럼, 그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죄’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라는 노래이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 몰라 제자리에 서서 뛰어오른다.” 수아도, 네불라도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의 삶이 1미터만큼 힘들고, 다른 누군가는 3미터만큼 아팠다고 해서, 고통을 비교할 수는 없다. 인생이란 바다는 누구에게나 자기 키만큼 깊고, 누구에게나 벅차다.
그래서 이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누군가의 삶이 틀렸다고, 그 길이 잘못됐다고. 수백 장의 사진을 찍은 수아조차도 끝내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누군가를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숨 한 번 쉬어보려 애쓰며, 제자리에 뛰어오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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